항우의 손길 피해간 병마용갱, 진시황능 일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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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우의 손길 피해간 병마용갱, 진시황능 일부일까

 과거 항우는 군자금 마련을 위해 30만 병사를 동원해 진시황의 무덤을 도굴했는데 보물을 나르는 데만 30일이 걸렸다고 한다. 도굴 후에는 수일간 내부가 불태워져 지하궁전이 무너지는 등 처참하게 파괴되기도 했다. 초나라를 멸망시킨 진시황에게 적개심을 품었던 항우가 그의 무덤을 온전하게 놔두었을 리가 없었을 것이니 그 참상이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반해 유방은 천하의 인심을 얻기 위해 능지기를 20호 두는 등 무덤을 보호했다. ‘한서 유향전’에 의하면 양치기 목동에 의해 큰 화재가 생겨 지하동굴 내부가 전소됐다. 신(新)나라 말기 적미군(赤眉軍)이 도굴 당시 동곽(銅椁)이 녹아내려 동 재료로 사용했을 정도였다. 5호16국 시기 후조의 석호(石虎)와 당나라 말기 황소(黃巢)의 대규모 도굴이 유명하다. 송나라 이후부터는 무덤이 보호되기 시작했다.
 
1974년 섬서성 서안 동쪽에서 출토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던 병마용갱(兵馬俑坑)이 진시황능의 일부였다면 아마도 항우와 황소 등에 의한 여러 차례 대규모 도굴 당시 분명 큰 화를 입었을 것이다. 시황과 아무 상관없었기에 기록조차 없다보니 도굴대상이 되지 못해 최근까지 원형이 보전되어 온 것이 아닌가 한다.
 
필자는 이 병마용갱은 진시황능이 아니라 아마도 우리 단군이 다스리던 조선과 관련된 유적지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 이유는 출토된 병사 모양의 토용들이 대부분 우리의 찰갑옷을 입었으며 모두 우리 민족의 상징인 상투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선이 서안 부근을 점령했었다는 확실한 사서의 기록도 있기 때문이다. 1733903993_kgwoAXml_e44b9648634e975f42ea0a0b226c87e3fe092cf9.jpg
 
       ▲ 려산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피라미드 모양의 진시황능과 병마용갱 [사진=필자 제공]
 
물론 진시황도 동이족이었기 때문에 그의 무덤에서 찰갑옷 입고 상투를 튼 토용의 출토가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병마용갱이 적개심에 불탔던 항우의 표적에 없었던 것으로 보아 최소한 진시황하고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만은 자명하다고 하겠다. 훗날 연(燕) 출신의 위만이 (번)조선으로 망명하면서 상투를 틀고 호복(胡服)을 입는 정치적인 제스처를 한 이유도 상투가 조선민족 고유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상징이 된 상투에 대한 기록은 ‘단군세기’ 2세 부루 단군조에 “3년(B.C 2238, 계묘) 9월, 조서를 내려 백성들로 하여금 머리카락을 땋아서 목을 덮도록 하고 푸른 옷을 입게 했다. 쌀되와 저울을 모두 통일하도록 하였고, 베와 모시의 시장가격이 서로 다른 곳이 없으며 백성들 서로 속이지 않으니 어디서나 두루 편안했다”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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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용들 대부분이 입고 있는 찰갑옷 [사진=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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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병마용 토용들의 여러 가지 상투 모양 [사진=필자 제공]
 
섬서성까지 점령했던 조선
 
단군이 다스리던 조선이 섬서성 서안 부근까지 점령했었다는 기록이 ‘단군세기’에 2군데 기록돼 있다. 첫째가 ‘단군세기’13세 흘달 단군조에 “16년(B.C 1767, 갑오) 이 해 겨울에 은(殷)나라가 하(夏)나라를 정벌하니 하 걸왕(桀王)이 구원을 청했다. 이에 단제께서 읍차 말량에게 구환(九桓)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싸움을 돕게 하니 은 탕왕(湯王)이 사신을 보내 사죄했다. 이에 말량에게 어명을 내려 군사를 되돌리게 했는데 하 걸왕이 조약을 위반하고 병사를 보내 길을 막고 약속을 깨려 했다. 이에 은나라 사람들과 함께 하 걸왕을 정벌하기로 하여 몰래 신지 우량을 파견해 견(畎)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낙랑(樂浪)과 합쳐서 진격해 관중의 빈·기(邠岐)의 땅에 웅거하며 관청을 설치했다”는 기록이다.
 
위 기록에서 흘달 단군의 결정에 따라 하·은나라의 판도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시 하도는 안읍(安邑)으로 현 산서성 운성시 하현(夏縣)이며, 은도는 조가(朝歌)로 현 하남성 신양시 위휘현이다. 하·은 두 나라의 싸움에 조선이 개입했다는 의미는 조선이 그들과 가깝게 있었다는 말인 것이다. 참고로 견(畎)은 섬서성에 있던 견이(畎夷)를 말하는 것이며 낙랑(樂浪)은 산서성 남부 원곡(垣曲) 일대, 빈(邠)은 섬서성 함양시 일대, 기(岐)는 섬서성 기산현의1733903993_vFSscofu_b164a92bc761d94ac2b233ef95b4e5be28d0b4b0.png 동북쪽이다.
 
       ▲ <단군세기>에 언급된 지명들 [사진=필자 제공]
 
위 <단군세기> 기록은 한나라 유향이 쓴 <설원 권모(設苑權謀)> 편에 비슷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여기서 이윤은 구이(=조선)가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하나라를 공격하느냐 여부를 결정했다. 그만큼 당시 그들에게는 조선이 절대적인 나라였던 것이다.
 
“성탕이 걸왕을 치려 하자 이윤이 ‘청컨대 걸왕에게 바치는 공물을 막고 그의 행동을 살펴보십시오’라고 말했다. 마침 걸왕이 진노해 구이(九夷=조선)의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자 이윤이 말하기를 ‘아직 때가 아닙니다. 저들이 아직도 능히 구이의 군사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잘못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고 말했다. 이에 성탕은 사죄하고 다시 공물을 바쳤다. 이듬해 탕왕이 다시 공물을 끊자 걸왕이 노해 다시 구이의 군사를 요청했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이윤이 ‘됐습니다’라고 말하자 탕왕은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잔당을 토벌하니 걸왕은 남소씨의 땅으로 도망쳤다.”
 
은 탕왕이 하 걸왕을 정벌한 곳은 순임금이 죽은 명조(鳴條)로 산서성 남부 운성시 부근인 염지(鹽池) 일대다. 맹자는 ‘이루장구 하(離婁章句下)’에서 “순임금은 제풍에서 태어나고 부하로 이사하시고 명조에서 죽으셨는데 제풍·부하·명조가 동이족의 땅이니 그는 동이사람이다.(舜生於諸風 移於負荷 卒於鳴條 諸風•負荷•鳴條 東夷之地 舜東夷之人也)”고 했으니 바로 여기도 조선의 영토였던 것이다.
 
[명조 : 고대 지명으로 지금의 산서성 운성시 안읍진 북에 있다. 은 탕왕이 하 걸왕을 정벌한 전투지이다. 고후원이라고도 한다. 일설에는 산서성 운성시 하현의 서쪽, 일설에는 하남성 낙양부근, 또 일설에는 하남성 신향시 봉구 동쪽에 있다고 한다.]
 
(원문) 鳴條: “古地名。在今山西运城安邑镇北,相传商汤伐夏桀战于此地。又名 高侯原 。古地名,又名高侯原,其地具体位置,异说甚多,一说在今山西省运城市夏县之西,一说在今河南洛阳附近,还有一说在河南省新乡市封丘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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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 상투는 그당시 동이족만의 문화였슴

        찰갑옷(철판 여러장을 겹댄옷)도 동이족만의 갑옷 임

        진시황이 동이족 출신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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